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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핵발전과 두려움

환경과 미래 53호, 2005년 봄호

 

산다는 것

핵발전과 두려움

이수경(사무처장)

핵폐기장 건설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정부는 작년, 논란만 일으키고 성사되지는 않았던 사회적 합의 절차 없이 핵폐기장 건설을 강행할 예정이다. 정부가 올해 10월말까지 부지를 확정짓겠다는 중저준위 핵폐기장은 안전성면에서 주민수용성이 높아 정부는 이번에야말로 지난 20년 가까이 분란만 일으키던 핵폐기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정부의 이런 판단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주민의 핵폐기장 유치 신청이 속속 보도되고 있으며, 정부는 이에 고무되어, 반핵단체 간에도 또 지역대책위 간에도 논란만 많던 사회적 합의는 요식적인 절차로만 끝낼 요량인 모양이다. 지역주민도, 사회단체도 이번 중저준위핵폐기장 건설에 있어서만큼은 정부의 기대대로 핵에 대한 불안을 떨쳐 버리고 핵폐기장을 수용할 것인가?

핵폐기장을 포함하여 핵발전에 대한 국민의 저항에 부닥칠 때마다 정부는 몰지각한 반핵운동가에 의해 정보가 왜곡되어 국민이 핵발전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으며 핵발전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국민에게 선전하고 홍보하면 국민의 핵발전에 대한 인식이 변화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정부와 원자력업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세계적인 홍보전문업체에 맡긴 원자력 관련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돈이 든 만큼 핵에 대한 광고는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국민의 불안감은 정부의 바람대로 자본과 과학적 접근으로 해소될 것인가?

많은 나라에서 핵발전을 포기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안전성과 경제성,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 등이 걸림돌로 작용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요인은 결국 사회적 수용성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사실 안전성이나 경제성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주관에 의해 결과가 유도되거나 현실이 해석 될 여지가 많다. 따라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갖는 연구결과는 도저히 같은 사실을 해석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결과를 종종 발표해 왔다. 그러나 주관이나 외부적 영향으로 결과를 의도적으로 왜곡하지 않은 이상, 이 서로 다른 결과는 나름대로 옳다. 그러므로 과학적 논쟁으로 상대의 모순을 드러내어 원하는 결과를 얻겠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 맹신이 가져온 망상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핵폐기장이 건설되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지역주민의 핵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정부는 이러한 지역주민의 핵공포가 반핵운동가의 거짓선전(?) 때문인 것으로 믿고 싶거나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정부는 위험성이 보다 낮은 중저준위 핵폐기장 건설은 과학과 합리성 그리고 자본을 바탕으로 한 홍보와 적절한(?) 보상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부는 부안을 계기로 누차 약속해 온 사회적 합의를 요식적인 절차로 전락시켜 버릴 태세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정부의 이러한 낙관은 또 다른 부안, 또 다른 피해주민, 또 다른 실패를 가져올 것으로 예견된다. 왜냐하면 핵에 대한 불안감의 뿌리는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전문가에 의해 독식되어 온 과학기술과 행정처리가 갖고 있는 오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핵에 대한 공포는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첫째, 핵에 대한 불안감은 피해의 상대적 크기에 기인한다.

핵전문가들은 피해의 발생확률과 피해 정도를 감안하여 위해도를 평가하여 핵발전의 위험이 자동차로 인한 위험보다 훨씬 작다는 주장을 해왔다. 사실 자동차로 인한 사망확률이 핵발전으로 인한 사망확률보다 훨씬 크고 우리가 자동차에 의한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일면 타당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한 핵발전 사고로 죽든 자동차 사고로 죽든 사망이 가져오는 개인적 비극성의 크기는 똑 같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망의 확률까지 고려하여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다. 사고의 단일규모, 그리고 사고의 파장이 사람들의 공포의 크기를 결정한다. 따라서 아무리 확률을 들먹이며 핵발전이 자동차에 비해 안전하다고 주장하여도 핵에 대한 사회적 공포는 줄어들지 않는다.

둘째, 핵에 대한 불안감은 선택할 수 있는 위험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고가 일어나면 보통 사망으로 이어지는 비행기 사고가 사고의 빈도와 피해 규모를 감안한 위해도가 핵발전 보다 훨씬 크다고 아무리 주장하여도 비행기에 대한 사회적 공포나 거부감은 핵발전에 비교할 수 없을만큼 적다. 이것은 안전에 대한 개인적 민감도에 따라 비행기 이용은 선택가능하다는 데 있다. 위험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이 비행기에 대한 개인적 공포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비행기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줄이는 데는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핵에 대한 불안감은 미지의 것, 통제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온다.

실제로 컴퓨터나 핸드폰 등과 같은 최첨단 기술이라도, 조작을 통해서 이용이 가능한 기술에 대해서는 통제가능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정보와 관리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어 있거나 일부집단에 의해 통제가 이뤄지고 있는 기술에 대해서는 반감과 의혹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것이 핵에 대한 사회적 공포와 거부감의 중요한 요인인 된다.

이와 같이 핵에 대한 사회적 불안은 정부와 핵산업계의 믿음과는 달리 그동안 핵산업계와 정부가 고수해왔던 정보와 관리에 대한 차단과 핵산업계가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행사해 온 지배력이 핵발전에 대한 국민적 선택을 가로막아서 키워낸 것이다. 불순세력(?)에 의해 조작된 정보로 수십년 간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막대한 자금과 공권력을 동원해도 핵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을 일부 불순세력의 선동 탓으로 돌리는 것은 속 편한 일이지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는 없다.

일부 지역의 일부 사람이 핵폐기장 유치를 신청했다고 해서 그 지역에서 안면도와 굴업도, 부안과 같은 저항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정부가 판단한다면, 이는 정부가 지난 핵폐기장 설치계획과 주민의 반대운동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그동안 핵폐기장 유치 과정을 살펴보면 늘 핵폐기장을 유치하려는 주민의 신청과 이를 반대하는 주민 그리고 주변지역이 있어왔다. 그리고 정부의 판단과는 다르게 반대주민을 이끌어 온 것은 핵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정부와 핵산업계의 폐쇄성이 한 축이며 수혜자와 피해자가 다른 거대산업이 갖고 있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지역의 분노가 다른 한 축이다.

정부가 이번에는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사회적 불안감의 뿌리인 핵의 에너지정책에 있어서 행사해 온 지배력과 폐쇄성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 먼저 고민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이해찬 총리가 차버린 사회적 합의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핵산업에 대한 반대자와 지역주민을 초대할 테이블을 마련해야 한다.

환경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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