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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거니는 자유(Freedom of Roam)(영국 체류기)

환경과 미래 47호 2003년 여름

거니는 자유(Freedom of Roam)(영국 체류기)

이 수 경(사무처장)

서울에서야 참 심심할 일이 없다. 혼자 방안에 있어도 TV를 틀어두고 가끔씩 재미난 데만 보는 재주를 가진 탓에 TV를 보면서도 심심하다는 얘기는 내겐 영 남의 일이다. 엎드려서 책을 보다 TV를 보다가 하다가 그도 지루하면 전화로 수다를 떨다가 낮잠도 자다가 하면 하루가 금방 간다.(써놓고 보니 백수가 내 체질인 성싶다) 그렇게 여러 날을 까먹어도 자고 나면 새 날이 밝고 새 책과 새 프로그램이 천지에 깔렸으니 맨날 심심할 일이 없다. 그래서 언제가는 한 달하고 보름을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방안에서 뒹굴 거린 기록도 있다. 한 발도 현관문 밖을 안 벗어나고 말이다. 그렇게 혼자 뒹굴 거리며 방바닥을 벗삼아 노는 게 취미이다 보니 어디를 가도 내가 심심할 일은 없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쯤 할 일도 없는 영국에 도착하고 나니, 금세 참 심심해졌다. 소포로 부친 책은 아직도 여러 날이 걸려야 도착할 모양이고, 도서관에 가서 쉬운 책이라고 구해다 놓아도 영어로 쓰인 책은 머리만 아프고 읽어도 읽어도 도대체 내 심심함을 가라앉혀 주질 못했다. 심심하니 방안에서 곰처럼 뒹구는 게 낙인 나도 별 수 없이 대문 밖을 나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과 마주치는 게 겁이 나서 집에서 조금만 가야지 했는데 집밖을 나서자마자 만나게 된 나무와 꽃에 끌려 조금만 조금만 하다보니 토끼며, 오리며, 양 구경에 정신이 팔려 나도 모르게 산책로를 따라 제법 걸어나오게 됐다.

키 작은 들꽃을 찾느라 발 밑만 쳐다보다가 울타리 너머 양을 보려고 눈을 들었더니 이상한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초록색 바탕의 화살표에 ‘footpath'라고 쓰였는데 화살표는 울타리 안을 가리키고 있다.

 

‘걷는 길이라…’ 그러고 보니 울타리를 넘어 농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울타리에 작은 사다리가 놓여있기는 했다. 그러고는 그만이다. 농장 안에 따로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 농장이라는 게 멀쩡한 남의 사유재산임이 분명해 보였다. footpath야 footpath이고, 나는 만족할 만한 산책로를 이미 걷고 있으니 내 가던 길로 갈 밖에.

첫 날의 산책에서 재미를 붙인 터라 나는 다음 날부터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 오늘 가는 길이 어제 간 길이어도 숲길은 맨날 새롭다. 새로 꽃이 피고 나무가 잎을 달고, 어제는 숨었던 동물이 나와 마주치고는 후다닥 뛰는 방향조차 매일 다를 뿐 아니라, 자연이란 것이 워낙 오밀조밀한 탓에 오늘 들여다보면 어제 못 본 것이 나무 그늘에 숨어있기도 한 까닭이다. 밖에서 보내는 일에 재미가 점차 들려가면서 내가 돌아다니는 영역도 점점 넓어졌다. 그러면서 그 이상한 표지판과 마주치는 일도 많아졌다. 산책로를 걷다보면 footpath 표시는 농장을 가리키거나 공동묘지 안을 가리키기도 했고 빨래가 턱하니 걸린 남의 뒤뜰을 가리키기도 했다. 아무리 영어만 보면 머리에 쥐가 나도 이쯤 되면 그게 뭔지 알아야만 하겠기에 맘을 먹고 자료를 뒤졌다.

도시든 국립공원이든 전원이든 영국의 어디를 걸어다녀도 심심할 만하면 만나게 되는 도로표지가 footpath이다. 2000년 11월 하원을 통과한 “길의 권리(보행권(THE RIGHTS OF WAY))"의 현실적인 토대가 바로 영국 전역에 그물망처럼 깔린 22만 5천㎞에 이르는 footpath이다. 거니는 자유를 위한 길의 권리란, 사람은 누구나 전원과 자연에 접근할 자유가 있고, 이러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자연과 전원에 접근하기 위한 토지에는 길로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 근본 이념이다. 길의 권리가 있는 토지는 공공공원, 황무지, 습지, 초원, 공공소유의 땅 등에 접근하기 위한 토지와 소유주가 접근을 허락한 토지 등이다. 그러나 삼림위원회(Forestry Commission),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 지속가능교통 전국자전거망 (Sustrans(sustainable transportation) National Cycle Network) 등이 조직한 길과 운하길, 연안 등도 법적인 권리는 없지만 통상적으로 길의 권리가 있는 토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토지에는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는 footpath, 사람과 말 그리고 자전거를 위한 bridleway 그리고 모든 교통수단에 대해 다 열려져 있는 byway open to all traffic 등이 있다.

길의 권리가 있는 토지에서는 누구나 그 곳을 지나다닐 수 있으며, 그 토지에서 경치를 감상하고 휴식을 취하고 그 길에서 나는 자연적인 생산품, 즉 야생의 과일이나 버섯 등을 채취할 수 있다. 거니는 자유라는 것이 말 그대로 통행의 권리를 말한다기 보다는 자연에 접근하고 향유할 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통과한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을 걷고 누리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적을 달리해서 헨리 소로우는 하루에 최소 4시간 이상을 자연 속에서 걷고 지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건전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시간과 단언이야 달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을 접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철학적 바탕이, 사유재산 개념의 발생지인 이곳 영국에서, 법적으로 토지의 공적 이용을 이끌어낸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footpath는 법적으로는 지방정부가 관리하도록 되어있으나 실제로 footpath를 관리하는 것은 19세기부터 거니는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 온 “산책하는 사람들 협회(Ramblers' Association)" 등과 같은 민간단체들이다. footpath 등 길의 권리가 있는 토지는 기부 등에 의해 조성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렇게 기부되는 토지는 별로 많지 않다. 그래서 일정한 기간(20년) 동안 방해 없이 길로 사용한 토지는 관습적으로 길의 권리가 있다고 법은 보고 있는데, 이런 토지를 찾아내서 지역정부에 footpath로 지정해주도록 요구하고 사람들이 footpath를 이용하기 쉽도록 footpath 시설물(농장 등에 진입하기 위한 사다리나 문)을 보수하고 footpath가 풀이나 나무 등의 성장으로 막히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길을 정리하는 일 등을 이들 단체가 회원들의 자원 봉사로 꾸려가고 있다.

 

지주나 농민의 입장에서야 농장과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양과 소 사이로 농장을 돌아다니는 방문객이 반가울 리 없기 때문에 footpath 지정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개를 풀어놓거나 가축에게 못된 장난을 하는 사람들 외에는 농장주인이 산책객을 냉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길의 권리가 있는 토지는 지도 등에 표시되어 있는데 지역도로당국 사무실(the office of local highway authorities)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마다 있는 관광정보센터에서 살 수 있는 지도에 footpath 등이 잘 표시되어 있고, 길게는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걸을 수 있는 footpath 코스가 영국 전역에 발달되어 있어 footpath를 따라 여행하는 영국내외의 전문 산책객도 많다.

이제 내가 그동안 줄곧 이용해온 랑카스터 대학에서 시내까지 연결된 산책길 외에도 돌아다닐 길이 무진장 확보된 것이다. 드디어 심심한 백수에서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본격적인 백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모자에 물통 하나, 등산화까지 신고 나서면, 들로 산으로, 양 사이로 소 사이로, 운하를 따라 숲길을 따라, 하루가 짧다고 걸어다녔다.

 

처음에야 조신하게 앞만 보며 농장길을 지나가거나, 뭐 바쁜 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목적지만 바라고 걸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거니는 자유라는 걸 만끽하게 되었다. 농장에 들어가서는 - 여기는 하루종일 농장에서 놀아도 주인을 만나는 일이 없다 - 초승달같이 생긴 양 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농장의 경계를 따라 심어진 블랙베리를 따먹기도 하고, 고개를 꺾어 어지러울 때까지 구름을 보기도 하고, 그랬다. 처음에는 어둑한 숲길을 걸을 때면 슬그머니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 랑카스터는 마녀 처형이 이뤄지던 마녀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 사람을 마주치면 괜히 화들짝 놀라 상대방이 더 무안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산책이 목적을 잊고 본격적으로 거니는 자유를 누리게 되면서 마음도 긴장에서 놓여나게 되었다. 산책길 드문드문 놓여진 벤치에서 해를 쬐는 동네 사람들하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빈 벤치에 앉아, 멍하니 운하를 따라 핀 산마늘꽃을 쳐다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걷는 것이 아니라 거니는 것, 빈둥거리며 자연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쉬고, 자연과 호흡을 나누는 일이 어떤 일인지 느끼게 되었다.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좋을까?

빈둥거리다가 지쳐서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다 보면, 지쳐서 어깨는 처지고 고개는 수그러져 땅만 보며 걷다보면, 어느 결엔가 내가 걷는 것이 길이 아니고 기억임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하루 종일의 방황으로 지쳐서, 그러나 자연과 호흡을 나누면서 충만해진 마음으로 만나는 기억이란 늘 빛 바래 있기 마련이다. 감정도 한숨 눅고나면 한결 지우기가 쉽다. 잊혀지지 않던 기억들을 묻고 돌아오는 산책길에서, 나는 그래서 늘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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