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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살기 무섭다

환경과 미래 63호, 2008년 봄

 

살기 무섭다

이 수 경(회장)

밥을 혼자 먹는 건 아무리 오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혼자 먹는 밥상은 늘 텔레비전 앞이다. 요즘 뉴스라는 게 밥 먹다 얹힐 소식뿐이라 밥 때와 뉴스 때가 잘 겹치지는 않도록 조정을 하는 데, 일산 어린이 폭행사고가 보도되던 날은 아마 저녁밥이 늦었나 보다. 결국 한술 뜬 밥은 체하고 먹던 밥은 그냥 음식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딸이 현관문을 들어서 신을 벗기도 전에 일찍 다녀라 어두운 데 가지 말라고 졸졸 따라 다니며 잔소리하다가 결국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란 소리 끝에 “나 스물 세 살이거든”하며 딸이 기막혀 웃었다.

연일 아이에 대한 폭행 장면이 되풀이되고 각종 프로그램마다 부모의 우려와 전문가의 대책과 문제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범률이 50%로 성범죄는 재범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전자팔찌제도와 성범죄자의 정보공개를 당장 확대 시행해야 한다고도 하고,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사형제를 부활해야 한다고도 한다. 범죄자의 인권보다는 천사같은 어린이의 인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어린이에 대한 범죄를 용서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또 어린이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가 성폭력 및 아동폭력 범죄에 대한 대책을 점검하고 보완해야 하는 것도 백퍼센트 공감이다. 가해자의 사진을 보면 벌벌 떨리고 죽일 놈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한 때 잘 나가던 유행어로 “거기까지.”

누구의 인권보다 누구의 인권이 더 소중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인권이란 건 사람이기 때문에 누릴 최소한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서는 가해자를 감금하고 벌을 주는 사법권을 유일하게 국가에게만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막강한 국가라는 조직이 제약할 수 없는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그게 인권이다.

성범죄의 “재범률이 높기” 때문에 성범죄자의 신원을 공개하라는 요구는 “미국이나 영국같은 인권 선진국(미국과 영국이 인권선진국이란 얘기는 이번에 처음 들어보았다)”의 사례를 들어가며 힘을 얻는다. 그런데 일반 범죄의 재범률이 60%를 넘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성범죄의 재범률이 높아 복역 후에도 신원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 재범률이 특히 높다고 하여도 재범률이 높다는 것은 교정제도의 실패를 뜻하기 때문에 성범죄의 교정제도를 보완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가 필요한 것이지 이미 형을 마친 가해자를 다시 벌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용의자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은 더 많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용의자를 검거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수 있으나, 이미 붙잡힌 피의자와 전과자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이 누구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일인지는 알 수 없다.

신원공개 논의는 피해자 부모가 얼굴을 공개하라며 울부짖는 사진을 배경으로 논의되곤 한다. 자식을 둔 에미로서 피해자와 가족의 모습도 분노도 백번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가는 일이나,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야만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국가가 사법권을 대신 행사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최소한의 약속이라면 손발이 벌벌 떨리는 와중에도 그동안 어렵게 쌓아온 인권의 기틀을 이렇게 쉽게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성범죄는 비겁한 범죄이다. 어린이에 대한 범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약한 자를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면서 사회에 대한 복수를 말하는 가해자는 졸렬하고 비겁하다. 그러나 이미 잡힌 용의자나 죄 값을 치른 전과자에게 복수를 말하는 사회도 비겁하다. 피해자의 분노는 백분 이해하지만 국가가 할 일은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다.

더욱이 성범죄자와 전과자의 신원을 공개하는 것은, 성범죄자 뿐 아니라 같이 사는 가족까지 벌하는, 우리 형법이 인정하고 있지 않은 연좌제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성범죄자의 형량이 너무 적다는 주장은 우리사회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하고 성범죄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가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사형제 부활과 평생신원공개라는 최강수가 논의되는 와중에도 우리사회는 버젓이 두 명의 성추행법을 국회의원으로 재선시켰다.

텔레비전을 틀면 아직 미성년인 어린 소녀들이 유혹적인 노래와 춤을 추고 나이 든 어른들이 열광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방송된다. 또 인기 많은 한 연예인은 "소녀떼"에 대한 구애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공공연히 미성년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취급하면서도 성범죄자에 대해서 걸러지지 않는 적개심을 드러내는 우리 사회는 흡사 범죄자를 속죄양으로 삼아 그 피를 땅에 뿌리면 우리 사회의 죄가 씻겨 질 거라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성추행범이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의원이 되고 포르노와 같은 성상품에 대한 규제에는 미온적이면서 성범죄자에 대한 인권을 억압한다고 해서 성범죄가 줄지는 않는다.

보호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는 인간의 인권까지 보호하는 것, 그건 가해자에게 관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하게 힘없는 자들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힘없는 자도 똑같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고 살아야 된다고 믿는 사회에서라면 성범죄나 아동범죄가 얼마나 파렴치한 범죄인지 사회구성원 모두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파렴치한 성범죄자와 사는 것도 무섭고 복수와 공개 처형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도 무섭다. 너나없이 좀 덜 원초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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