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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끝없이 성장해야 사는 사회

환경과 미래 67호 2009년 겨울호

 

끝없이 성장해야 사는 사회

이 수 경(회 장)

기대수명이 늘어 45세면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시기라고들 한다. 사오정이니 뭐니 하는 놀림 속에서도 기죽지 말라는 소리처럼 들어도 좋으련만, 나는 ‘시작’이라는 말이 자꾸 목엣가시 같다. 비틀린 심성이 정점을 지난 인생에서도 계속될 모양이다.

만 45세를 넘던 해에 나는 가슴 아픈 이별을 겪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마다 꼭 등장하는 눈물 핥아주는 개, 콘스탄테처럼 내게도 15년 동안 내 눈물을 핥아주던 개가 있었다. 집에 오던 때부터 유난히 조용하고 겁이 많던 그 개는, 늘 내가 있는 곳에, 있었다. 내 몸 어느 구석에 늘 제 몸을 기대, 그 개가 온 뒤로 한군데는 시리지 않게 보냈다.

개를 떠나보내고도 일 년이나 지났는데 나는 아직도 익숙지가 않다. 발꿈치가 따뜻해서 돌아보면 눈이 착했던 그 개가, 없다. 귀갓길 대문을 열면 현관 발판 위에서 뒷발로 서서 깡충거리거나 맴을 돌던 기쁜 그 몸짓이, 없다. 난 아직도 이별을 확인하는 매 순간마다 내 심장 한 조각을 얇게 싹 저미듯 아프다.

개는 떠나기 오래 전부터 내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변해 갔다. 개의 생이 인간의 생에 비해 유난히 짧은 탓에, 나서 성장하고 늙고 죽어가는 한 생명의 사이클이 보다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내가 탄 차보다 속도가 빠른 차만, 달리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는 개를 통해 인생의 한 사이클을 선험한 셈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삶의 궤적처럼 개는 활동을 늘리고 애정과 관계를 늘리다가 성장이 휴지기를 맞자 관계나 활동도 안정되고 고착되었다. 그리고 성장한 것처럼 빠르게 늙어가면서 개는 그저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거나 활동을 줄이고 따뜻한 품을 찾아 기어들어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애정과 삶을 마무리하기에도 개는 나날이 힘겨워지는 듯 했다.

결국 나도 그 개와 함께 하는 매 순간이 이별로 걸어가는 길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늙어 입 냄새가 심해진 개가 나를 핥을 수 있도록 기꺼이 나를 내밀었고 개는 이제 침도 말라 핥을 때마다 고통스럽게 쩍쩍 붙는 혀로 내 눈가를 핥았다. 그렇게 내 눈물을 핥는 그 개와 나만의 특별한 의식을 계속함으로써 나는 우리 관계를 마무리하려는 그 개를 도왔다. 아주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그 개에게 내 눈가를 내어줌으로써 그 개의 위로가 내 인생에 큰 힘이 되어줘서 고마웠다고 전했다. 점점 먹는 양을 줄이더니 물조차 먹지 못하는 그 개를 위해 죽을 쑤어 내밀면 그 개는 혀끝으로 죽을 몇 번 건드려주곤 했다. 마치 하루 종일 집을 비우고 마른 먹이만 먹이던 내 죄책감을 끝내라는 듯이.

우리는 서로 해주고 싶던 것을 해 주고, 평생 죄의식이나 미련으로 남을 일들을 끝낼 수 있도록 몸과 시간을 내 주면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오래 그 개가 내게 죽음과 이별을 준비시키고 떠났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개의 기억이 견딜 수 없다. 아직도 잠에서 깨면 그 개의 부재에 놀라고 내 베개 옆 그 개가 누웠던 자리를 더듬게 된다. 앞으로도 오래 나는 그 개로 인해 가슴이 아프겠지만 나는 그 개로 인해 15년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일은 삶을 준비하는 일보다 더 품이 드는 일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다. 끝없이 새로운 사람과 분야에서 벌이고 시작하고 도전하는 가치보다, 같이 해 온 사람들과 함께 마무리하고 나누고 미련을 버리는 가치, 나이 들수록 그게 더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라는 걸 알게 된다.

성장해야만 돌아가는 사회, 성장하지 않으면 위기가 오는 사회, 끝없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 하면 된다는 사회, 그런 사회는 내겐 암세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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