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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하는 게 시민운동이다

비판을 반성하며 길을 찾다

환경과 미래 53호, 2005년 봄호

특 집 / 환경운동, 신발 끈을 다시 묶다

비판을 반성하며 길을 찾다

이수경(사무처장)

올 것이 왔다.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범하고 지난 20년 가까이 환경운동은 비판의 무풍지대에서 성장해 왔다. 성장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성찰은 부족했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할 일은 넘쳐났다. 오류는 누적되고 숨고르기를 권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내 외부를 막론하고 거세고 아프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환경위기의 시대에 환경운동의 위기를 말하는 비판을 거울삼아 환경운동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보자.

제도화 된 환경운동

“권력의 단 맛에 취해 환경운동 본연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은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초 에코생협이 대기업에 물품판매를 협조하는 공문을 보낸 것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지기는 했지만 이러한 비판은 각 단체 내부 혹은 단체 사이에서 환경운동조직이 출범하던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다. 같은 사안을 두고 연대활동을 벌이던 단체가 관련된 기업으로부터 용역사업이나 협찬을 받는 일에 대한 시비로 단체 간의 연대가 깨진 일도 있었으며 같은 단체 안의 활동가 사이에 기업의 협찬을 받는 일을 두고 반목이 벌어진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 비판이 기업의 협찬을 받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강하게 제기되었던 데 반해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내부논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정부나 기업의 협찬에 대한 내부의 의견이 일정 정도 수렴되었음을 반영한다.

기업의 협찬을 받는 일을 가지고 외부에서 순수성의 훼손을 운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운동의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고 기업이나 정부의 참여 방식에 대해서는 소속 회원이 판단하거나 정하고 이를 외부에 분명히 알리면 될 일이다. 순수함을 강조하는 것은 애초의 취지는 어떠하든 운동을 폄하하는 도구이거나 극단적인 운동 형태만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운동의 순수성보다는 진정성이 보다 중요한 잣대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기업과의 관계설정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환경운동 단체 내부에서 고민하고 단체의 원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정보를 회원과 외부에 공개하고 운동이 이러한 외부에 의해 휘둘리지 않을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함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정부와의 관계는 보다 복잡하다. 기업과의 관계설정이 기업의 협찬이 있기 이전부터 논의되고 준비되었다면 정부와의 관계설정은 실질적으로 정책 협조가 한참 진행되고 난 후에 제기되기 시작되었다.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시작된 민간의 정책 참여는 IMF 구제금융 이후(정부조직의 축소를 위해 정책 및 행정에 대한 민간참여가 IMF 대부 조건 중의 하나임) 정책 및 행정부문에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때부터 시작된 정부의 대국민 홍보 및 교육사업에 환경운동단체 등이 참여한 것을 두고 조선일보 등이 앞장서 비판하고 있는 “정부와의 야합”이며, 정부위원회에 참여하여 정책의 계획, 시행, 평가과정에 참여한 것이 “권력의 단 맛에 취했다”는 실체이다.

정부에서 발주하는 용역사업에 대한 비판은 비판의 요지와는 다른 이유로 환경운동이 고민해야 할 숙제이다. 정부에서 발주하는 용역사업은 주로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정부정책을 홍보하거나 교육하는 데 치중되어 있어서 이를 수행하기 위해 역량의 지나친 소모와 운동의 연성화를 불러왔다는 비판은 숙고해야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각급위원회에 참여하여 환경운동의 성과를 반영하려는 노력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환경거버넌스가 환경운동에서 하나의 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위원회 참여를 비롯한 정부와의 파트너십에 대해 평가하고 이에 대한 원칙과 전략을 수립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정책참여의 문제점으로 실질적인 공조에 이르지 못하고 들러리를 선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에 대해서 그것이 민관공조의 한계인지, 환경운동의 준비 부족인지에 대해 검토하여야 한다. 환경사안에 따른 운동 전략의 수립이 적절하였는지, 민관공조를 통해 해결할 사안과 다른 접근방법을 동원할 사안의 구분이 명확하였는지를 평가하고, 민관공조에서 정책참여의 성과를 높이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또한, 민간이 개별화되어 정부정책에 참여하는 그동안의 참여방식을 진정한 민간참여라고 볼 수 있는 지에 대한 숙고도 필요하다. 민간의 의사수렴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도 민관공조에 참여하는 민간은 개인자격이 아니라 대표성을 갖고 참가하여야 하며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는 참여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정책과정에 반영할 민간의 목표를 설정하고 논의하는 구조를 마련하여야 한다. 이는 환경단체가 그간 정부나 기업에게 정보의 공개와 공유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민간 내부에서도 이러한 공개와 공유 구조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없는 시민운동

환경운동이 일부 활동가와 상근 활동가에 의해 장악되고 집행된다는 비판은 “시민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로 자주 요약되며 환경운동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회원의 수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대의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시민의 참여와 권리행사를 목적으로 하는 시민운동의 한 갈래인 환경운동에서 이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환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느는 것과 비례하여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시민이 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운동의 시민참여를 실패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먼저, 개별 단체의 회원 수가 늘지 않거나 지속적인 감소를 보이는 현상을 두고 환경운동의 시민참여가 실패했다는 평가하는 방식은 시민운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개별 단체의 성장이 주춤해진 것과는 별도로 지속적으로 환경운동 조직이 늘고 있으며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전체 활동가 수도 증가하고 있다. 또한 시민운동은 시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운동일 뿐 아니라 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회원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시민참여 부재의 지표로만 볼 수 없고 활동가의 저변이 확대되고 다양한 부문에서 운동조직이 생겨나는 것을 다른 지표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민참여를 평가한다면, 부안 핵폐기장을 계기로 결성된 부안의 시민운동조직을 환경운동 전체의 성과로 평가하여야 하며, 새만금에 많은 역량을 투입하고도 부안 새만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한 데 따른 지원의 부재 혹은 연대의 부족이 반성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러한 시민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개별단체가 부안을 통해 성장하지 못했음을 환경운동의 한계로 지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회원의 활동 참여에 대한 환경운동의 적극적인 전략 마련이 부족했다는 데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시민을 대상화하여 “감동을 주는 환경운동”이 되지 못했다는 비판은 수용하기 어렵다. 오히려 지금 환경운동이 반성하여야 할 것은 시민을 일회적인 퍼포먼스나 이벤트,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 감동에만 기대어 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시민운동이 격에 맞지 않게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주장은 사회적 약자인 소수(숫자로서의 소수가 아닌 기성사회의 비주류로서의 소수)의 사회참여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내는 일이다. 시민운동은 다수에 의한 민주주의 방식의 문제점에서 출발하여 현재의 정책 집행이나 입법과정 등에 소수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시작된 운동이다. 따라서 환경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의 숫자가 목소리의 크기를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시민운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대안없는 환경운동

환경운동이 새만금, 핵폐기장, 천성산 등 국책개발사업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일 때마다 빠지지 않고 지적되던 환경운동의 한계가 바로 “대안과 전문성의 부재”이다. 환경운동도 이러한 외부의 지적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전문가의 참여를 늘이고 개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있다.

환경운동에 대안이 없다는 지적은 옳다. 더구나 환경운동의 위기를 맞고 보니 이러한 지적은 참으로 옳다. 환경운동권은 물론 개별적인 환경단체 조차 환경운동의 전망과 전략을 수립하고 활동하고 있는 지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같은 단체에서 내놓는 정책제안이나 운동 목표의 전망이 사안마다 또는 같은 사안에서 조차 혼동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전망 없음은 외부에서 지적하고 있는 대안의 부재와는 의미가 다른 자성이다.

언론이나 정부에서는 새만금 등 문제가 된 개발사업의 중지를 요구하는 환경단체에게 늘 대안 없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환경운동이 개발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대안없는 운동이라는 비판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오히려 잘 못된 개발정책에 대한 환경운동의 문제제기에 대해 개발대안이 없으면 문제제기를 수용할 수 없다는 개발주체의 억지에 휘둘리는 것이 환경운동의 전망부재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환경운동은 개발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나름의 전망과 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가져야 하고 환경사안마다 이러한 전망에 따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환경운동의 대안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환경운동은 개발의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에 지나치게 위축되어 온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이 바로 그것이다.

환경운동이 전문성을 갖추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는 전문가의 영입이나 활동가의 전문영역 개발 등이 논의되고 실행되어왔다. 물론 환경운동이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갖추는 일은 필요한 일이지만 이것이 제도권이 보증하는 전문능력의 무조건적인 이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만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환경운동의 전망을 공유하지 않는 민간추천 전문가로 인해, 새만금운동 성과 중의 하나였던 민관공동조사의 결과가 훼손되었던 경험이 다른 사안에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이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환경운동의 전망을 공유하는 전문가의 합류 뿐 아니라 전문가와 활동가의 역할분배 못지않게 활동과 전망의 공유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참여의 원칙과 공유의 방법들도 구체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환경운동의 문제라고 지적되는 위의 근거들이 제도권이 오독한 환경운동의 위기라면 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위기의 징후들도 있다.

개발주의와 비민주적인 정권과의 대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미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의 특징이 되어버린 속도와 성장으로 인한 관료화, 소통의 부재 등은 운동조직 내부의 이견이, 서로 경쟁하며 조화롭게 발전하는 것을 저해하여, 운동이념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갈등을 불러오는 주요 불만이 되고 있다. 또한 환경운동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각 단체의 역할 분담 등에 대한 단체 내부, 단체간의 의사소통도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시민운동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의 성과를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연대의 무용성을 논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환경운동의 위기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환경운동에 대한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반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환경운동의 입장에서 그러한 비판이 환경운동을 위축시키거나 분열의 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추스르고 연대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은 더더욱 분명하다.

환경운동이 분명한 자기 전망을 갖고 개발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환경운동의 전망과 대안을 다시 세워야 한다. 운동의 주체를 설정하고 운동의 방식과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환경운동 진영은 물론 각 단체가 환경사안에 따른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운동단체간 뿐 아니라 운동단체 안에서도 운동의 성과를 나누고 논의하는 공개와 공유의 틀을 마련하여야 한다. 이러한 운동 주체간의 정확한 입장과 대안정리를 통해 운동의 다양성과 차별화를 시도하고 이러한 분명한 자기입장을 바탕으로 한 연대가 도모되어야 진정한 연대의 신뢰가 구축된다. 이러한 대안마련은 내부의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시작되어야 하며 이것이 환경운동 위기의 시기에 우리에게 온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