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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이라크전 소고(영국 체류기)

환경과 미래 46호   2003년 4월

- FOOTPATH에서 동물이랑 나랑

이라크전 소고(영국 체류기)

이 수 경(사무처장)

1. 이곳 영국에서 보는 뉴스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는 한 국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집권 노동당의 어느 하원의원이 반전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각료직에서 사임을 했다더라 하면서 아주 영웅으로 만들어 일대기를 보도하기도 하고, 국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총리를 공공연히 부시네 '푸들'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또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나온 총리를 사회자와 질문자가 합심하여 몰아세우고 야유하고, 좀 인사치레로 웃은 총리에게 왜 웃느냐고 지금 그게 웃을 일이라고 생각 하냐고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연일 적국의 국민을 인터뷰하면서 이 전쟁이 얼마나 부당한 전쟁인지 떠들어대고, 학생들은 맑은 얼굴과 목소리로 반전을 어른들에게 호소하기도 합니다. 야 참 별일이구나. 역시 민주주의의 종주국답구나. 세계화를 먼저 시작한 국민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이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부럽네 저 시민의식. 처음에는 참 감탄스럽더군요. 더구나 영국에 오면서 좋은 거만 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워낙 비뚤어지게 40년을 살다보니 좀 지겨워져서 곱게 마음먹고 살자고, 그래서 이래도 좋은 쪽으로 저래도 좋은 쪽으로 보려고 했는데 정말 더 이상은 못 참겠더군요. 천성이 어디가나요?

2. 영국의 방송을 보고 있자면 영국은 누구보다도 인륜을 아는 국가입니다. 우리 나라의 진보적인 신문조차도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전 지지 발언에 국익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말 아무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고사는 전쟁에 더구나 국제적인 승인을 얻지 못한 전쟁에 국익이라니요? 그럼 국익을 위하지 않은 전쟁을 보기는 했던가요? 미국도 영국도 나치도 누구도 국익이 없다고 믿으면서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국익을 위해서 전쟁을 해서는 안 되는 게 근대화의 몇 안 되는 성과이고 국제법이고 세계질서인 것입니다. 그 정도 상식은 여기 언론과 정치인은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국익을 계산하되 그걸 말로 표현하지는 않을 정도의 도덕성은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건 위선 아니냐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위선을 부리는 순간에는 그게 창피한 줄은 알고 있다는 말일 테니까요. 국익을 위해서 부당한 전쟁을 한다는 사실이. 그걸 입 밖으로 내서 말하기 시작한다는 건 그게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른다는 뜻이겠지요, 결국. 그래서 처음에는 감탄했지요. 부끄러운 줄은 아는구나 싶어서. 그런데 이게 점점 묘해지더군요.

3. 여기 와서 본, 웃긴 일 중의 하나가 이 사람들이 하는 데모란 거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기숙사 앞에 잔디밭이 있는데 주차장이 모자라다고 학교가 그곳의 반을 주차장으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대학의 환경단체에서 나와서 피켓 들고 시위하고 며칠 그러더군요. 그러다가 어영부영 방학 하니까 다들 집에 가버렸습니다. 학교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예정대로 휴가에 티타임에 챙길 거 다 챙겨 가면서 결국 주차장을 느릿느릿 만들었고 그러는 동안 학생들은 여행가고 놀러 다니느라고 코빼기도 안보이데요. 그러더니 그만입니다. 반대는 했다 이거지요. 나는 반전시위를 보면서 그때 생각이 나더군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반전 시위를 하면서 이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겐. 그냥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기려고 꼭 전쟁을 막아내야겠다고 그러는 게 아닌 거 같더란 말씀입니다. 나는 전쟁 안하는게 좋겠다. 그래도 하면 그건 미국이 너무나 나쁜 놈이고 우리 나라 총리가 푸들이라서 그런 거지 우리는 반대했다. 그러는 거 같더라구요. 그래서 경기가 살아나면 좋은 거지만 우린 그래도 전쟁에는 반대했다. 그건 다 미국과 정신나간 총리가 저지른 짓이다. 전쟁으로 인한 이익도 챙기고 싶고 윤리적인 비난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어정쩡하게 반대하고 있는 거 같아 보여서, 방송이 열 올리며 이야기하는 반전이 좀 역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4. 또 막상 전쟁이 시작되니까 더욱 가관이더군요. 멀리서 찍은 폭격장면이 하루종일 생중계로 방영되는데 멀리서 찍은 폭격장면은 참 아름답더군요. 이 사람들이 핑계만 있으면 터뜨리는 폭죽놀이같더군요. 그걸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몇 발만 떨어져서 보면 그 속의 사람들을 보지 않으면 전쟁이든 뭐든 참 그림이 좋을 수도 있구나. 그 속에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l2년을 살아내고 - 부시가 그랬다죠 미국은 12년을 기다려왔다고- 죽은 자식을 안고 울고 있어도 그것만 보이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면, 어쩌면 기름을 뒤집어 쓴 바다조차도 화면에서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시작한 전쟁, 지지율이 차츰 올라가더니 이제는 찬성이 반대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긴 목전에 전쟁위기가 놓인 우리 나라에서도 소위 진보적이라는 인사들조차 국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 침략에 끼여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마당에 그걸 탓할 자격이 있나하는 생각이 아주 안드는 건 아닙니다.

5. 영국에서는 참전파의 제일 중요한 명분이 이라크에서 인권을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라더군요. 가장 웃기는 일입니다 내겐. 지난 휴가에 대영 박물관 구경을 갔습니다. 입구부터 지난 문명의 자취가 압도하더군요. 많이도 훔쳐다 놨구나하는 생각과 그래도 다 떼 오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에게는 고조선시대에 해당하고 영국에게는 석기시대에 해당하는 5천년 전에 저리도 웅장한 문명을 건설한 이들이 있었구나 싶더군요. 물론 우리 딸은 옆에서 저걸 건설하려면 죽어나간 백성은 얼마였겠냐고 감탄을 거듭하는 내게 쐐기를 박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게 바로 지금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땅 이라크의 앗시리아 문명입니다. 나는 먼저 문명을 꽃 피웠다고 선진국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그냥 다 우리 인간에게는 다 같은 가능성과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선물하기 위해서 폭격한다구요? 이라크 국민은 손에 쥐어주지 않으면 민주사회를 건설할 수 없는 얼간이라고 판정한 그들의 오만이 나는 전쟁보다 더 지겹습니다. 한국전이 끝나고 영국을 포함한 소위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랬다지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요. 그래 보였겠지요. 미군을 쫓아다니며 초콜릿이나 구걸하는 더러운 거지들의 나라에서 그들이 본건 누런 황인종일 뿐 인간은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국익을 위해서 우리 나라에서 독재자를 지원했지만 그래도 그 더러운 황인종 거지들은 고문도 불사하고 죽음도 불사하고 스스로 민주주의를 일궈냈습니다. 우리가 그랬듯이 이라크도 그럴 수 있음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 사람들이 반전이건 참전이건 어느 쪽에 서있든 이라크 국민을 위해서라고 말할 때 나는 구역질이 납니다.

6. 우연히 학생들이 -생각 없는 몇몇 학생이겠지요-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짧은 영어 때문에 드문드문 들은 거라 안 그랬다고 우기면 할 말없는 얘기기는 합니다만, 점증하는 테러 위협에 떨더군요. 이제 부활절 휴가인데 어디 비행기를 맘놓고 탈 수가 있어야 놀러갈 텐데 하면서, 진짜 겁에 질린 목소리더군요. 갑자기 한국에 너무나 돌아가고 싶어지더군요. 자기 목숨 중해서 남의 목숨 잡자는 한국사람들이 더 나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들하고 나하고는 같은 목숨 값이 아니구나, 죽어도 목숨이 똑 같이 '개 값'인 사람들 속에서 죽어야 서럽지는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 사람이라고 어디 다 그 값이 같기야 하겠습니까만은.

7. 내가 더욱 한국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책임이 없는 곳에서는 권리도 없다는 걸 정말 뼛속 깊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곳에 처음 도착해서는 참 좋았더랬습니다. 몇 년 전부터 노래 부르던 무책임의 자유를 아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고 좋아라 아이고 좋아라 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이라크 전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고 여기서 반전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내가 이 곳의 아무 것에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이유가 나는 이곳의 현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그래서 나는 아무런 주장을 할 수도 없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다시 책임질 것이 있는 한국이 몹시 그리워졌다는 얘기입니다.

8. 이제 미국은 보란 듯이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유엔이 미국의 침략에 앞서서 이라크를 무장해제하자, 국제질서니 대량살상무기니 떠들어대던 미국과 영국은 유엔의 승인도 없이 대량살상무기를 그 땅에 퍼부어 대고 있습니다. 이제 그나마 허울뿐이던 유엔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국가간의 이해를 조정하던 정부기구의 모임이 미국의 폭격으로 제일 먼저 박살이 난 것입니다. 세계화니 뭐니 하면서, 세계가 2차대전 이후의 낭만과 60년대의 이상을 내던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국익을 위한 약육강식의 질서가 이제 이라크 전으로 세계질서로 떠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만들어 온 인간의 질서가 그걸 막아내고 있습니다. 정부간의 이해를 조정하던 유엔 대신 세계의 시민사회단체가 그 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몇 십만이 모이는 저변이 넓은 서구의 반전운동도 훌륭하지만 자기 힘으로 민주주의를 일구고 외세를 배격해낸 우리와 같은 약소국가의 반전운동이 세계의 질서를 바꾸는 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미국에 반대해 온 유럽의 시민사회의 반대보다 우리 같은 우리 이익 걸고 목숨 걸고 하는 반전이야말로 미국의 시민사회에 더 뼈아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전하는 국가의 숫자가 미국에게 중요했듯이 반전을 얘기하는 시민사회를 갖고 있는 국가의 숫자도 중요합니다. 나는 국가간의 조정 기능이 무너진 곳에서 시민사회가 더욱 훌륭히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피워낸 우리시민사회도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여 제 몫을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환공연도 늘 그래왔듯이 제 몫을 찾아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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