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감이라 유감

애플데이

환경과 공해 45호, 2002년 12월

 

애플데이(영국 체류기)

이 수 경(사무처장)

사람은 어디 있든 자기하고 비슷한 사람끼리만 만나게 되는 걸 보면, 인연이라는 건 결국 매 순간마다 선택한 결과가 모인 거라는 말이 생각났다. 만리타국에 와서까지, 아무리 영국에는 환경운동가가 흔하다지만, 환경운동가를 친구로 두게 될 줄이야.

여기 도착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차가 필요해서 중고차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10년 정도 된 차인데 아주 깨끗하고 값도 싸게 나온 차가 있어서 구경하러 갔다. 차의 전 주인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도보여행자의 천국이라는 영국에서 일년동안 실컷 트레킹을 즐겨보겠다고 했더니, 차 주인은 반색을 하면서 트레킹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서로 하던 일에, 하는 일에, 할 일에 그런 얘기 끝에 그녀의 친구인 환경운동가 피터를 알게 되었다.

화근은 새만금에서 시작되었다. 피터가 한국의 환경운동을 궁금해 하기에, 우리 자료랑 새만금자료를 진땀 빼면서 영작을 해서 가져다 줬더니 아주 반색을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대기 시작했다. 본인이야 한 마디면 되는 말이지만 나야말로 날 밤 샐 일이 생긴 거다. 게다가 피터는 대학에서 영어강사를 하던 사람이라 말만하면 옆에서 교정을 본다. 한국에서 잘난 척하면서 남의 말 교정보던 죄 값을 내가 영국에 와서 치르는구나 싶다.

그래서 늘 말린 자두 같은 것만 먹는 채식주의자인 피터라는 영국친구가 생겼는데, 하루는 어디서 어린 애 주먹만한 시고 떫은 사과를 가져다주면서 애플데이(10월 둘째주 토요일)에 꼭 오라고 했다.

 

사진 1. 애플데이

애플데이가 조지 그레그슨 커뮤니티 센터에서 열린다기에 그 동네에 가서 아무리 회관 같은 것을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결국 물어 물어 찾아가 보니 그 커뮤니티 센터란 데가 외양도 동네 그냥 팝건물과 하나도 다를 게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내부도 그냥 팝이었다.(팝은 동네마다 있는 맥주 집인데 여기서 아마추어 가수가 노래를 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끼리 퀴즈도 하고-영국 사람들은 퀴즈를 무지 좋아한다, 그러면서 밤에 모여서 노는 데다. 우리 나라 맥주 집만한데 특징은 팝에 오는 손님끼리 서로 잘 알고, 대강 테이블 구분 없이 다같이 노는 게 특징이다-그런데 이건 다 들은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안 가봤으니까-)

입구에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히피 아가씨 둘이 세상 고민 다 껴안은 얼굴로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일인당 일 파운드인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는 약 2,000원 정도인데, 입장료를 냈더니 해지호그(영국 고슴도치로 보호종이다) 스탬프를 규격이 맞지도 않는 종이에 찍어주면서 그걸 갖고 들어가면 사과주스를 무료로 먹을 수 있다고 심드렁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약간은 험악한 분위기에 좀 질리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해서 입구로 들어서니, 한 쪽에 사과여신이 사과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호들갑스레 우리를 반겼고, 다른 구석에는 손님인 주최자인지 구분이 잘 안가는(우리단체 행사 참가자들처럼) 사람이 개가 앉을 바닥에 자기 코트를 깔아주면서 유난스럽게 굴고 있었다. 도대체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나중에 짐작한 사실인데 이곳의 환경운동가는 대개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담배를 피고(대개 아주 골초다) 가죽점퍼를 입고, 인상이 험악하면 진보적인 환경운동가이고, 채식주의자에 혐연가며 선량한 표정을 가진 쪽은 보수적인 환경운동가라고 생각하면 90% 정도는 맞는다. (물론, 이건 내 분류법이다. 그 사람들이 이걸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모르겠다. 아마, 진보적인 환경운동가들은 씩 웃고 곧 인상을 찌푸릴 테고, 보수적인 환경운동가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것임에 틀림없다.)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가르는 기준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환경문제의 주된 해결 방법을 개인의 실천에서 찾는 지 혹은 제도의 개선에서 찾는 지가 이 두 진영의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차이점 같았다. 이런 분류법으로 나누어 보면 환공연 회원들은 어느 진영일까?

벽에는 애플데이의 의미를 설명하는 문건이 학예회에서처럼 예쁘게 붙어있었고, 한쪽에서는 사과주스를 열심히 짜주는데, 기계가 말을 잘 안 듣는지 아니면 솜씨가 모자라서인지 사과주스를 기다리는 줄이 영 줄어 들 기미가 안 보였다.

 

                                            사진2. 애플데이 행사장 벽보

 

                                       사진 3. 사과주스 짜는 모습

 

LANCASTER SEED SAVERS(LSS)에서 주최하는 애플데이는, 농업이 산업화되고 규격화되면서, 사라져가는 종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야생사과가 자라고 있는 지역의 낙후된 과수농가를 지원하는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사이다.

애플데이는 먼저,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과가 어떤 것인지와, 야생사과가 갖는 환경적 의미를 소개하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하는데 이 날 소개된 랑카스터에서 생산되는 사과가 무려 50종이나 되었다. 그래서 속으로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사과가 몇 종인지 가늠해보려고 했지만, 아는 사과 이름도 몇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내가 소비하는 사과의 종이 한 두 종류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진4. 랑카스터에서 생산되는 50여종의 사과

솔직히 야생사과가 상품에 길들여진 우리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러 가지 사과가 갖고 있는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일부는 놀랄 만큼 떫거나 시긴 했다. 하지만 이러한 품종들이 갖고 있는 유전적 가능성을 보전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오래된 과수농가나 야생사과를 재배하는 농가를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행사를 주최하는 목적이다.) 의외로 일회적이지만은 않은 야생사과의 매력이기도 했다.

물론, 이 행사에서 농가지원금의 세계 경제적 의미를 따져보는 환공연 회원들도 있겠지만, 너무 크게만 생각하지는 마시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진보적인 환경운동가의 이념은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얼굴은 그다지 매력적이 아닌 것은 분명하므로.

이 날 행사의 두 번째 목적이자 이들이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지역의 유기농가와 소비자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인데, 이는 환경적인 농업을 위해서는 결국 소비자와 생산자의 연대가 관건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LSS에서는 매주 정기적인 자체상점(GREEN MAN)을 열고 있으며, LSS가 보증하는 농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상점을 표시한 지역지도를 정기적으로 배포하고 있었다.

이날 행사의 세 번째 목적은, 제3세계의 환경파괴와 빈곤을 불러오는 불공정한 농산물 교역의 실태를 알리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전세계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대하자는 데 있다. 그래서 이들은 옥스팜 등, 공정한 무역을 통해서 수입되는 외국 농산물만을 사용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시민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애플데이 외에도 LSS는 감자의 종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포테이토 데이(1월)와 농업생산자(농가 뿐 아니라 텃밭을 가꾸는 일반 시민도 포함한다)간에 서로 씨를 교환하는 Seed Swap(12월 7일) 행사를 연다.

이 날 행사에 동양인이라고는 달랑 우리 식구뿐이어서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통에 떫고 신 사과주스만 연신 홀짝거리다가 탁자에 놓인 홍보물을 보았다.

탁자에는 LSS의 홍보물 외에도 그린피스의 청정에너지 프로그램(JUICE)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용지와 Chelverton's Plans for Destruction(랑카스터의 반환경적 도시개발계획인 Chelverton's Plans을 저지하기 위한 시민의 모임)의 홍보물도 같이 놓여 있었다.

13만이 사는 작은 도시인 랑카스터의 환경단체들은 이념이나 실천과 같은 여러 가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Lancaster Resource Centre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각 단체의 사업은 회원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로 해나가기 때문에, 일반 사무적인 일은 공동의 간사와 공동의 사무실에서 해결해 나가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해나갈 수 있는 것은 다른 외양과 행동양식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차이가 보완적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으로 보였다.

 

                                                 사진5. 랑카스터 단체 홍보물

 

행사장을 나서는 데, 들어갈 때의 그 히피 아가씨들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야생 사과의 떫고 신맛이 삼키기엔 그다지 수월하지는 않지만, 입안에는 진한 향기를 오래 남기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나는 훨씬 산뜻하게 웃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