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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상처, 헤집다

환경과 미래 52호, 2004년 겨울호

산다는 것

상처, 헤집다

이 수 경(사무처장)

발에 작은 유리조각이 박혔습니다. 제 딴에는 열심히 치우면서 산다고 했는데, 살면서 흘리고 다닌 오류들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나를 치고 맙니다.

방에 들어가서 발을 들여다보려는데 영 거북살스럽습니다. 허리가 잘 굽혀지지 않으니 발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워낙 유연성이야 떨어졌지만 허리 굽힐 줄 모르고 살아 온 세월이 제 발바닥 들여다보는 일조차 이리도 부들부들 떨리게 만들었나 봅니다. 유리조각이 박힌 살 양편을 잡고 살을 늘이니 발바닥이 하얘졌습니다. 박힌 유리조각이 보입니다. 집게를 찾아서 유리조각을 집으려는데 손이 영 둔합니다. 유리조각을 몇 번 놓치다가 결국 유리조각은 더 깊이 박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리가 발바닥을 뚫고 들어가도 그 흔적은 보입니다. 발바닥에 유리가 박힌 길을 따라 피가 배어 나와 하얀 발바닥에 검붉은 줄이 생겼습니다. 한 번에 정확하고 단호하게 집어냈으면 되었을 오류가 이제 결국 빼내도 남을 흉이 되고 마는 거겠지요.

발바닥을 잡고 있던 손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마디 없이 하얀 손이 그리 세월을 먹은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손 놀리는 걸 아까워하면서 살았으니 살가죽에는 세월이 남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 거죽에 남지 않는다고 그냥 스쳐가기야 했겠습니까? 거죽 반반한 만큼 세월은 손놀림을 갑절로 둔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멍청하게 손을 들여다보다가 그 손으로 유리조각이 박힌 발바닥을 더듬어 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유리가 박힌 살은 아픕니다.

이번엔 아예 그 주변을 들쑤십니다. 주변 살을 다 들어내고 말면 유리조각이 박힐 자리도 없는 거겠지. 유리조각 주변의 살을 헤집으니 이번엔 피가 번져 유리조각마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얼얼하니 발바닥이 아픈데 그게 약간의 쾌감도 동반합니다. 처음엔 조심스럽던 손이 이제 아주 작정을 하고 나니 유리조각 찾을 생각은 잊고 주변에 붙은 살 파내기에 몰두합니다.

결국 유리조각이 나왔습니다. 피범벅이 되고 만 발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또 아차 싶습니다. 제 오류 집어내겠다고 늘 옆에 사람들을 더 못 살게 만들고야 마는 제가 제 발바닥 위에 있더군요.

뒤늦게 주변을 다독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약통을 뒤졌습니다. 옥도정기 약통에 흘린 옥도정기가 말라붙어 있었습니다. 유효기간을 보니 십년도 넘었더군요.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늙은 몸에 오래된 약이면 어떠랴 싶어 처덕처덕 발랐습니다. 제법 쓰라린 게 제 몫이야 하겠지 싶다가, 십년이나 소독약 필요 없이 산, 상처 없는 내 세월에 축배를 들고픈 생각이 듭니다.

절룩거리면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축배를 들기 전에 어지러 놓은 약통이랑 솜이랑 그런 걸 치우는데 방바닥에 옥도정기가 묻어서 노랗게 번득이는 발자국들이 눈에 띕니다. 몸이 굼떠져도 늙지 않는 내 조급함이 결국 내 발바닥 뿐 아니라 방바닥에도 흔적을 남기고 만 거란 게 좀 슬프더군요.

축하할 일과 슬픈 일, 술안주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요? 그래서 또 잔이 넘치도록 붓고 마시고.

다음 날 일어났더니 발바닥이 화끈거리며 쑤시는군요. 기어이 덧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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