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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월드컵 소원

환경과 미래 56호, 2006년 여름

 

월드컵 소원

이 수 경(사무처장)

나는 운동경기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릴 때면 거의 텔레비전에 코를 박고 산다. 하긴 요즘은 스포츠 채널이 있어서 늘 내 호시절이긴 하다. 본 경기 재방송을 또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면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운동경기란 게 처음에야 승부 위주로 보지만 승부를 알고 난 다음에는 잔기술이나 잔실수까지 또 눈에 들어오니 봐도 봐도 새로운 세상인 걸 어쩌랴.

운동경기라면 육상에서 역도, 격투기에 구기시합까지 다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도 종목불문, 잘 하는 경기가 주는 재미가 으뜸이니, 세계에서 잘 한다는 선수들만 모아놓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시간표까지 작성해가며 볼 만큼 좋다. 드디어 2006월드컵이 열린다는 유월이 돌아왔으니 심심한 내 일상에 꽃놀이가 도래한 거다.

월드컵 때문에 사회적 의제가 실종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재미에 눈이 멀어 누구에게나 여유로울 내 심기를 심하게 건드리지만 않는다면야 남들이 잘 알아서 하는 과열된 월드컵 열기를 탓하는 진단에 뛰어들 생각은 없다. 작년의 개인적인 대사건 이후로는 누가 나만 못하랴 싶어 훈수 두는 일을 삼가리라 맘먹었지만 삐딱한 천성이 어디 가랴. 2006월드컵의 주변상황이 운동경기 시청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는 데야 참견병이 도질 밖에.

도시 한 복판 한 외국인이 지나간다.

광고1.말도 안 통하는 낯선 도시에서 쭈뼛거리는 외국인에게 어디선가 축구공 하나가 날아온다. 외국인이 패스한 공을 푸줏간 주인이 헤딩으로 패스하고 야채상도 빵집 점원도. 다시 동네 꼬마들이 몰고 가는 축구공 뒤엔 다 함께 웃는 이방인과 현지인이 있다. 그리고 상표.

광고2.외국인이 낯선 도시를 걷고 있다. 세 명의 현지인이 그를 둘러싼다. 물건을 줍는 척 하기도 하고 서로 악수하는 척도 하면서 외국인의 진로를 방해한다. 외국인은 당황하고 밀착수비, 뭐 이런 자막이 뜬다. 그리고 다음에는 역시 상표.

월드컵을 통해 세계인이 하나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국가 간 경기가 사회를 전체주의적 태도를 용인하거나 수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는 걸 모를 사람이 있을까? 광고1에서처럼 축구를 통해 세계인이 하나가 된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게 고급스런 수사거나 그럴 수 있다고 믿게 만들려는 데에는 또 다른 음모가 숨어있을 수 있다는 건 이제 뭐 별로 참신할 것도 없는 진단이다. 그러니 오히려 광고2에서처럼 노골적인 차별 혹은 배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 솔직한 건 아닐까? 아니면 광고2는 미쳐 날뛰는 사회에 대한 야유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서 문제다. 축구공을 통해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축구를 통해 극우적 태도가 판을 쳐서도 그걸 용인해서도 안 되는 건 분명하다. 2002년 이후 운동경기에서 국가명 표기가 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슬그머니 바뀐 것도, 아무데다 태극기를 들고 다니며 대한민국을 강요하는 것도, 월드컵 승리를 기원한다고 젊은이들이 삼보일배를 하며 몰려다니면서, 참회의 진정성을 야유하는 것도 참으로 참아내기 힘들다. 이놈의 축구경기가 주는 재미가 뭐라고 이 미친 짓에 동조를 하여야 하나 싶다가도 슬그머니 눈이 텔레비전으로 가는 건 내 참을성 없음 탓이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하여도 도저히 축구경기에 몰입하지 못하게, 해설자와 아나운서가 설쳐댄다.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넘쳐나고, 해당국가의 경제력에 따라 교만과 비굴이 숨겨지지도 못한 해설을 결국은 참아내지 못하고 음소거 버튼을 누른다. 소리 없음이 주는 이 무미함이라니.

제발 운동경기 좀 보자. 제 편 없는 운동경기를 보는 일은 이미 재미의 반을 접고 들어가는 일인데. 제발 아무 생각 없이 한국 좀 응원하게 내버려 두었으면. 월드컵을 맞는 내 소원은 딱 이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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