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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 유감

나만 잘 하고 살 생각입니다

환경과 미래 59호,  2007년 봄

나만 잘 하고 살 생각입니다

이 수 경(회 장)

정치인들은 흔히 역사가 평가할 거라는 말을 하더군요. 저는 그 말을 듣기가 불편합니다. 우리가 권리를 임대해 준 정치인이 우리 평가를 무서워하지 않고, 자신은 시간을 초월한 선각자연 하는 게 불편하고 믿음을 버리게 합니다. 현재 주어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미래의 일까지 걱정하는 척 하는 그들이 좀 주제 넘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긴 역사의 평가란 게 오늘 당장 이뤄질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 못하는 역사의 평가로 미뤄두는 일이 편하기도 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나는 역사의 평가를 말하는 사람이 비겁해 보입니다.

미국이 이라크전의 명분으로 이라크의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것이 제일 화가 났습니다. 그 말 속에 숨은 편견이, 멸시가 싫었습니다. 아무도 맡긴 적 없는 책임을 당사자를 대신해 지겠다는 그들의 우월감이 역겹습니다.

미래세대의 권리라든가 생태적 사고라든가 하는 게 환경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일임을 모르거나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았던 우리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하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속가능한 생태적 사고가 이제는 모든 행위에 앞서 고려되어야 할 가치라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불편합니다.

미래세대의 권리와 생태적 사고가 하나의 가치로서 고려되어야 하지만 누군가 자연과 미래세대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기 시작하면 의심이 부쩍 듭니다. 말 못하는 그들의 권리를 누가 행사할 것이냐는 의문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미래 세대가 겪어야할 피해를 미리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생태계의 파괴로 생활터전이 망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것은 환경피해가 모두에게 같은 시간에 같은 강도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더 많이 당하는 환경피해자들이 우리들과 같은 시각에 같은 땅 혹은 같은 행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미래인 사회적 약자보다 미래세대나 자연에 더 많이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갖고 우리 마음대로는 움직여주지 않는 그들 대신 말 못하는 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그들의 권리를 대행하는 게 더 쉽고 더 편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인간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보에서 인간과 생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보로 넘어가야 한다는 생태진보는 말 못하는 그들의 권리를 대변할 전문가와 환경운동가의 몫만 더 키우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요?

나날이 환경운동에서 전문가의 역할이 커져갑니다. 환경거버넌스가 자리를 잡아나가면서 정부는 각종 위원회를 만들고 민간의 의견을 청취하는 일이 정례화 되어갑니다. 이 자리에 민간 전문가와 활동가들의 참석이 늘고 이를 통해 민간의 경험과 지식이 활용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거버넌스 활동이 민간에 정부의 정책을 공개하기 위해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정책에 민간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서만 활용됩니다. 결국 그동안 민간에게 널리 정부의 정책을 알리고 의견을 수렴하던 것이 몇 몇 개인에게 귀속되고 있습니다. 위원회 활동이 정부에게는 다양한 의견 청취의 기회를 넓혔지만 민간에게는 오히려 정부 정책에 의견을 반영하는 문을 더 좁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랜 환경운동과 시민운동의 성과가 사유화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주민운동과의 분리를 얘기하는 목소리가 반핵진영에서 들려옵니다. 그러나 시민운동과 주민운동의 역할 분담은 이미 오래 전부터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자꾸 분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건 역할 분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주민운동과 함께 하는 일을 회의하는 게 아닌가 하여 걱정스럽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이런 회의는 반핵운동의 기적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민운동이 반핵운동으로 또는 에너지운동으로 포섭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주민운동을 대하는 환경운동권의 우월감에서 시작된 비판이 아닐까요? 주민운동은 그것 자체로의 역할이 있고 동력이 있습니다. 핵폐기장 반대라는, 같은 목적으로 만나 주민은 핵폐기장 설치를 저지하고 반핵운동은 핵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데 성공 하였습니다. 그 결과 시늉이나마 재생에너지에 대한 정부와 사회적 관심이 환기되었습니다. 핵폐기장 저지운동을 통해서 주민의 에너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반성까지는 반핵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나, 그렇기 때문에 주민운동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주민운동의 고유의 역할에 대한 이해 부족과 우리운동의 가치가 그들의 가치보다 높다는 우월감과 독선은 혹 아닐런지요?

주민운동을 하는 일은 때론 지치고 허무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민과 환경운동이 만나 좋은 성과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오해에 시달리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주민운동의 역동성이 아니라면 세계적으로 시민운동권의 감탄을 자아내는 세 차례에 걸친 핵폐기장 저지가 과연 반핵운동의 힘만으로 이뤄졌을까요? 또 그런 성공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반핵진영이 지금처럼 핵발전문제를 의제화할 수 있었을까요? 성공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고 섭섭해 할 당사자가 꼭 우리이기만 할까요? 우리는 주민운동의 동력을 이용해서 우리 주장을 펼칠 장을 얻었으니 우리가 더 감사할 일은 아닐까요?

살면서 책임져야 할 일 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제대로 정리 못하고 지고 다니는 짐이 버거워서 한 때는 이 짐을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루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내 교만입니다. 내가 주체이듯이 내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또한 주체입니다. 잘 돼도 잘 못 돼도 인간관계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은 반, 내 몫 뿐입니다. 나만 잘하고 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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