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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하는 게 시민운동이다

부안에서 밝힌 100일째 촛불기원

환경과 미래 48호, 2003 겨울

 

<돌아보기>  부안에서 밝힌 100일째 촛불기원

이수경(사무처장)

좁은 봉고차 안이었지만, 맨 뒷자리를 차지하게 되어서 마음은 한없이 느긋해졌다. 뒤에 사람을 두지 않는다는 사냥감같은 본능 때문인지, 주행 중인 차의 뒷자리가 가장 위험하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낯선 사람들 뿐이라 이어폰을 끼고 준비해 간 음악을 듣는 여행길은, 의례적인 대화를 이어나가야 하는 지루함까지 덜 수 있어서 한결 홀가분했다. 창 밖으로는 가로수의 낙엽이 휙휙 지나가고, 태풍에도 벼를 키워 낸 논은 단풍 든 산 아래에서 노랗게 일렁이고 있었다. 케빈 컨의 음악은 감미로웠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논 풍경은 한가로웠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부안은 떠들썩하고 흥겨웠다. 차일 밑에서 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뛰어다니기도 하고 반핵을 상징하기 위해 맞춰 입었다는 노란색 조끼는 부안을 온통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차일 밑에서 유인물을 나눠주는 사람들의 느린 말투는 서울에서 듣던 지치고 시큰둥한 느린 말과 달리 묘한 음조를 띄면서 느긋하고 즐거운 시골의 축제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게다가 부안을 시커멓게 뒤덮었다던 전경들은 민간대화기구가 구성된 이후에 읍내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부안의 촛불행사는 그저 시골 운동회 같기도 하고, 장날 같기도 한 흥겨운 잔칫날 이었다.

6시에 시작한다는 촛불행사까지는 약 4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같이 온 사람들과 굳이 같이 어울리자면 못 어울릴 일도 아니건만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도 낯 간지러운 내숭 때문에 혼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주민대책위가 있다는 부안성당을 찾아가는 길은 내게는 말 그대로 진땀나는 길이었다. 걷는거야 튼튼한 다리 덕에 서너 시간쯤 일도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일은 늘 여간 고역이 아닐 수가 없다. 서울 같으면 사람들에게 길을 묻느니 차라리 아는 길이 나올 때까지 걷고 말겠지만 그도 처음 오는 길에서는 영 대책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쭈뼛거리다가 길을 물었더니 대로가 끝나는 곳까지만 가르쳐주곤 그 다음은 거기 가서 물으란다. 낯선 사람 한 사람 한사람에게 묻는 일이 지옥같은 일이라는 건 내 사정이고, 그쪽이야 봐하니 서울내기가 길을 잃을 것 같아 한껏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데 하라는 데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길을 걷는 시간보다 길을 묻느라고 쭈뼛거리는 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야 부안성당을 찾았다. 부안성당에는 부안에 도착하면서부터 보아 온 에드벌룬이 높이 떠 있었다. ‘처음부터 풍선만 따라왔으면 됐을 걸’ 하는 생각은 길을 찾은 사람의 여유 뒤에야 오는 후회였다. 성당에 들어서 주민대책위를 찾으니 활동가들은 이미 행사 준비에 모두 동원이 되었다고 하고 성당 마당에서는 나중에 그 공연의 이름을 알게 된 “부안난타”가 한참 연습 중이었다.

 

 

성당을 나서서 사진도 찍고 군내 구경도 하면서 돌아다녔다. 소도시는, 사는 사람이야 속 터질 일이 많겠지만 나 같은 나그네에게는 가장 좋은 놀이터이다. 자그맣게 끼리끼리 어울려있는 집 모양새에서 사람들 삶도 그렇듯 어울려 지내려니 하는 정겨운 짐작을 지어내는 일도 재미나고, 조금만 걸으면 벗어나게 되는 포장도로에서 만나는 논이랑 밭을 구경하며 일년 텃밭농사도 농사경험이라고 ‘이 집 농사는 잘됐는데, 무청이나 얻어다 시래기나 만들었으면’하고 구시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재미도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군내에서 길을 물을 때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가 헛바람이 들도록 잔뜩 돌아다니고 나서는 제법 의기양양해져서 행사장으로 돌아왔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달리 사람은 몇 모이지 않아서 100일을 기념해 세운 장승이 초라하다고 느끼며 줄에 끼어 앉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촛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줄타기가 시작되고 줄타기에 넋을 빼앗기고 있는데 좀 좁혀 앉아달란 말에 주위를 둘러보니 텅 비어있던 행사장에 사람이 가득했다. 그제야 주섬주섬 사람들에게 사진기를 들이대고 보니, 엄마 손을 잡고 나선 아이, 농번기 일을 마치고 나온 할머니, 일찌감치 장사를 접고 나선 음식점 아주머니가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농번기라 사람들이 전만 못하게 참석했다는 진행자의 설명이 엄살로 들릴 만큼 7만 7천여명 살고 있는 부안군에서 모인 사람이 족히 수 천명은 되어 보였다.

 

 

부안 촛불기원 100일을 기념하는 영상물 속에서 서너 살 남짓한 아이는 김종규는 물러가라고 노래하고 있었고, 전경의 방패에 코뼈가 내려앉았다는 아주머니는 이건 부안 군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도 하고, 한 번도 촛불행사를 거른 적이 없다는 할머니는 뭐 당연한 걸 갖고 사진기를 들이미냐고도 했다.

할 일없이 쏘다니던 오후 내내, 아이들 옷 가게며 학용품 가게, 약국, 병원, 식당마다 거리거리에 붙어있던 노란 반핵 포스터와 허수아비 대신 논마다 서있던 반핵 깃발을 마주쳐야 했다. 온 군민이 나서서 반대하는 데, 나라를 위한 결단이라고 주장하는 군수를 시스템과 절차를 중시한다는 대통령이 친히 전화를 걸어 치하했다더라 하는 뉴스가 떠오르기도 하고, 안면도에서 굴업도에서 결국 핵폐기장 유치를 철회 시켰지만 그러느라 몇 년 공든 양식장이 다 망가졌다던 반핵주민운동가 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둔 밤 하늘 속에서도 에드벌룬이 잘 보였다. 처음부터 에드벌룬만 보고 찾아갈 걸 하는 후회가 떠올랐다. 목적만 바라보고 걷는 길이 더 빠르고 편한 길이었을 텐데 하는 낮의 후회를 어두움 속에서 슬그머니 물리기로 했다. 더듬거리며 길을 묻느라 진땀도 나고 길은 더뎌졌을지 모르지만, 그러느라고 내가 길을 물은 누군가에게 외지에서도 부안을 지지하고 있다는 걸 우회적으로 알린 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회원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오래 같이 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 빚어내는 정겨움이 이방인인 나까지도 훈훈하게 만들어주었다. 부안으로 떠나던 길의 홀가분함과는 다른, 더불어 같이 가는 훈훈함이 집을 찾아드는 귀로에는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환경운동도 어느 지점에서는 이런 훈훈함으로 다시 일어서 혼자 갈 용기를 갖게 하는 건 아닐까?

밤이 깊어 모두들 잠든 차 안에서 다시 이어폰을 주섬주섬 찾다가 갑자기 케빈 컨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림을 펼쳐놓은 듯이 아름답고 마음을 편안하고 감미롭게 만들어주는 그의 음악은 그의 장애 속에서 자라났고, 낮에 본 그 황금의 들녘은 태풍 매미로 쓰러진 벼를 묶어 세운 농부의 아픔 속에서 자라난 것처럼, 오늘 부안의 아픔과 눈물로 밝히고 있는 촛불 하나하나가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다음 한 걸음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